글로벌경제신문

2020.11.3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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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연구소장 임성순
[한글연구소장 임성순]
2020년 1월 5일 봉준호 감독의 미국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이 큰 화제를 낳았다.

“1인치 자막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은 훨씬 더 좋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외국 영화를 보지 않는 미국인의 폐부를 찌르는 명언이고 촌철살인이다. 봉 감독은 실로 언어의 마술사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미국인은 외국어로 된 영화나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는 다르다. 우리는 자막 달린 외국 영화와 드라마 보는 것을 즐긴다. 그 어떤 언어도 상관없다. 우리나라에서 상영되는 외국 영화는 거의 자막이 달리고 더빙되는 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영화뿐이다. TV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더빙을 입힌 외국 영상물은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성우들의 일거리가 줄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왜 자막을 좋아할까?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는 어떨까? 대부분 더빙을 선호한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은 거의 모든 외화가 더빙으로 상영된다. 1인치 자막을 싫어하기는 매한가지이다. 태국은 아예 법으로 더빙을 강제하고 있다. 일본어는 한자, 히라가나, 가타가나로 이뤄져 불편 끝판왕이다. 자막으로 읽는 속도가 느려 이해도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중국어도 매한가지이다. 한자로 자막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더구나 중국은 지방마다 언어가 달라 자막을 사용하기는 더욱 어렵다.

봉준호 감독은 ‘1인치에 불과한 자막’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 그 장벽은 만리장성보다 높다. 영어권 사람들도 자막 읽을 때 어려움을 느낀다. 영어로 자막을 읽다 보면 장면을 놓치기 십상이고 재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봉 감독의 충고는 마치 영화 <기생충>에서 명문대생 민혁(박서준 분)이 재수생 기우(최우식 분)에게 ‘맨날 술을 마시고 노는 대학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미국인이 게으르거나 외화에 편견을 가져서라기보다 영어의 원초적인 한계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한글로 무장한 한국인은 다른 나라 문자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쉬운 예를 들면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세로 자막을 아무 불편 없이 읽었다. 영어를 세로 자막으로 읽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 번 시도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글 읽는 속도는 타 문자에 비해 2배 가까이 빠르다. 많은 수험생들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동영상 시청할 때 2~3배 속도로 본다. 나도 자막 있는 동영상을 볼 때 2배 속도로 한다. 우리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행위는 외국인 입장에서 경악스러운 일이다. 연구에 의하면 글을 빨리 읽는 것은 높은 지능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고 속독은 두뇌를 발달시킨다. 선순환 효과이다.

미국 할리우드 대중문화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문화의 용광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전 세계 인종, 민족들이 미국이란 나라에서 녹아들기 때문이다. 창조성은 융합에서 나온다. 한류가 철옹성과 같은 할리우드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팝, 영화, 드라마, 게임, 만화 등 거의 모든 문화 영역에서 한류와 한글이 할리우드와 영어를 대체하고 있다. G2(Group of two)는 미국과 중국이 세계 2강의 국가라는 용어로 쓰인다. 십수 년 안에 미국과 한국이 ‘G2 문화대국’이라 불릴 것이다.

한글은 그 자체가 문화의 용광로이다. 한글은 다른 문화를 담아내는데 최적의 언어이다. 훈민정음 자모 28개는 기본자 8개(자음: ㄱㄴㅁㅅㅇ 모음: • ㅡ ㅣ)의 확장에 불과하다. 이 8개 기본자를 근거하여 세상의 모든 언어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 실로 기적의 언어가 아닐 수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창조란 다른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577년 전 세종대왕이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고통받는 어진 백성을 위해 만든 한글이 이제 만개하고 있다.
세상의 언어는 3,000~6,000개에 달한다. 실제 사용하는 문자는 40여개에 불과하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문자의 뿌리는 사실상 딱 3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집트 문자에서 파생된 원셈문자, 황하강 갑골 문자에서 시작한 한자 그리고 한글이 그것이다. 문자학적으로 말하자면 세계 3대 문명은 이집트 문명, 황하 문명, 조선 문명(혹은 세종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 문자는 ‘그림 - 그림 문자 - 단어 문자 - 음절 문자 - 음소 문자 - 자질 문자’ 순으로 발달한다. 한글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음소 문자이면서 동시에 자질 문자’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미국 대학생이 단 한 시간만 배워도 한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속된 말로 한글은 바보도 배울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세종대왕이 한자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신하들의 거센 반발을 물리치고 눈까지 멀면서 친히 한글을 창제한 이유이다. 세종대왕은 다 계획이 있었다.

사람들은 공기, 물의 소중함을 모른다.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한글은 우리에게 바로 그와 같은 존재이다. 영화관과 넷플릭스에서 자막을 읽으면서 한글의 고마움과 위대함을 느끼지 못한다.
단 3%의 양반이 지배하고, 천민이 50%가 넘었던 전근대성 끝판왕 조선 왕조가 500년 동안 지속됐다. 9세기 가나 문자를 만들어 고도의 문명국으로 진화한 일제에게 국권을 상실당한 부끄러운 조선이다. 그 후진적인 조선이 1945년부터 초신성과 같은 문명 대폭발을 일으켰다. 당시 80%에 달했던 문맹률이 순식간에 거의 0%로 떨어졌다.

한강의 기적, 한류 열풍은 한글 덕분이다. 방탄소년단 정국과 블랙핑크 지수가 세계 미(美)의 중심이 되고 있다. 단지 한국인이란 이유로 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한글의 위대한 혁명 덕분이다. 한글은 ‘신의 선물’이고, 그 신의 이름은 세종대왕이다. 이제 국뽕 한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켜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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