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2024.04.25(목)

-이데올로기 피의 역사를 사랑의 온기로 뒤바꾸고 있는 한 경찰 가족의 이야기

[비욘드포스트 양윤모 기자] 무명의 한 집안 4대의 애끓는 가족사의 상흔을 따라가면 민족 질곡의 역사와 만난다.

할아버지의 항일. 반공역사,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반공의 역사, 그러나 3대 손자는 4대 증손자와 함께 반전의 역사를 꾀한다. 동상에 걸린 북한 어린이에게 방한부츠를 지원한다. 이데올로기 피의 역사를 사랑의 온기로 뒤바꾸고 있는 한 경찰 가족의 이야기이다.

집안 3대인 박종선(75세)씨는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3부자가 모두 북한군에게 죽임을 당한 무명 경찰가족의 후손이다. 그의 가문은 한마디로 빨치산에서 몰살당한 항일. 반공 전사 집안이다. 항일 무장 독립군이자 빨치산 무장공비 토벌의 주역이었던 할아버지는 전투 중 포로가 되어 고문 끝에 사살당했다. 뒤를 이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마저 전투 중에 각각 전사하였다. 모두 경찰이었다.

한국은 종전 직후 들어선 혼란의 개발독재 정권시절 서슬 퍼런 반공의 시대를 거친다. 반공은 국시이자 모든 개인, 단체를 관통하는 가치 불변의 중심 규범이자 시대적 무오류의 종교였다. 박종선씨 집안은 그 종교의 피의 제단을 관리하는 충직한 사제 집안이었으리라.

'공산당이 싫어요' 그 절규가 유시가 되고 가풍이 됐을법한 그 집안에 반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언제부터인가 박종선씨는 “공산당이 불쌍해졌다” 그래서 아들인 4대 박성대에게 “그들을 용서하자”고 선언하고 급기야 집안의 '반공 헌법'을 '용서 헌법'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에 “불쌍한 공산당 아이들의 동상 걸린 짓 물린 발가락 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전현충원에 이장된 박태문, 박정래, 박경래 3부자 경찰가족 묘역을 찾은박종선(중앙), 부인 김영숙(우), 아들 박성대(좌)
대전현충원에 이장된 박태문, 박정래, 박경래 3부자 경찰가족 묘역을 찾은박종선(중앙), 부인 김영숙(우), 아들 박성대(좌)


부자는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발가락 동상예방을 위한 겨울부츠 사업을 2008년부터 진행하고 있던 북한대학의 某 교수와, 중국신발공장 대표 등과 실행팀을 구축했다. 사업이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을 갖추고 일부참여 아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겨울부츠 사업팀은 중국선양의 민간단체와 북한 나선경제특구의 신발공장이 협력하고, 어렵사리 북한정부에서 외국인 최초 유통업허가를 얻어냈다.

신발은 작아서 북한군인이 사용 할 수 없음을 설득해 미국의 허가도 받아냈다. 현재 박성대씨는 북한 어린이를 돕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의 협력이 중요해, 중국 차하얼학회 상무이사, 세계청상클럽 한국대표, 북경강소기업상회 국제위원 등의 직분을 수행하며 동시에 중국기업가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함께 꾀하고 있다.

몇해전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 생존혁신 과제로 문화변혁을 상정했다. 그리곤 BTS의 공연을 위해 '여자도 공연장에 올 수 있도록' 관습법을 바꾸었다. 이를 반대하는 중요 부족장들을 숙청까지 했다. 국가 헌법을 바꾸는 것도 힘들지만 이 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누대로 내려오는 한 사회와 집안의 관습법을 바꾸는 것인데, 박종선씨는 어떻게 집안의 '복수의 법'을 '사랑의 법'으로 바꾸었을까? 그는 선친들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하게 되었을까?

모든 것의 인과는 뿌리가 깊다. 특히 누대에 걸친 가족사가 민족사의 은원과 함께 얽혀 있을 때, 그 뿌리는 시공을 넘어 우리를 옥죄고 제한한다. 혜량하기 힘든 그들 선친들의 삶으로 들어가 본다.

■박태문 (1891~1951 박종선의 할아버지)

1910년 그의 나이 20세 때, 한일합방 국치가 일어난다. 당시 애국지사 매천 황현선생의 자결에 자극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1907년 설립된 호양학교(壺陽學校) 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9년 구례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1년부터 노고단 선교사 거주지 건립에 인부로 참여하면서 동연배였던 린튼 선교사와 민족의식이 강한 레이놀즈 선교사 등에게 영향을 받아 지리산 포수로서 선교사들과 항일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지리산 일대에서 벌인 보급이 부족한 무장항일 투쟁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희망은 멀리 있었고 죽음은 늘 가까이 있었다. 당시 '구례 박포수'라고 유명했던 할아버지는 이웃에겐 사냥을 한다며 총과 탄환만 가지고 나가 5~6개월 후, 사냥감 하나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불운한 실력 없는' 사냥꾼의 삶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었고 조국은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준비없이 맞이한 해방의 후폭풍은 거세었다. 반도를 양분한 미. 소 신탁통치 반대로 민족은 분열하였고 남북은 서로 멸절의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이 터진다.

항일무장투쟁은 반공무장투쟁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는 전쟁 전후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참여한다. 지리산 일대의 항일무장운동 참여로 주변지형과 도주로 등을 잘 아는 그는 피아 모두에게 중요한 인물이었고 파출소에서 경찰의 보호 하에 거주했다. 이윽고 그를 생포하기 위해 빨치산들이 파출소를 기습하여 모든 경찰을 죽이고 할아버지만 생포하게 된다.

공비들은 그를 계속 회유 하였으나 거절했고, 권총을 정수리에 대고 20분 정도 더 설득한 후 끝내 동참을 거절하자 사살했다고 전해진다. 그때가 바로 1951년 7월 30일. 전사한 곳은 전남 구례군 산동면 원촌이다. 그 후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나 분실했다. 참고로 625전쟁 전후로 많은 군인. 경찰들이 무공훈장을 받았으나, 전달과정에서 분실하거나 그 후 분실한 사례가 매우 많다. 일부 수훈자 중에는 전달 관련 일지마저 없어 증빙이 없는 분들이 많다. 흉터나 몸 안의 파편으로 일부 내용증명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할아버지의 무훈 역시 그러할 것이다.

■박정래 (1925~1950년 박종선의 아버지)

1935~40년(11~16세)까지 선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18세인 1942년부터는 지리산 주민들에게 야학을 한다. 여순사태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에 아버지 뒤를 이어 참여 했고 1950년6월1일 무주 덕산에서 공비들의 매복작전에 대응전투 중 전사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보다 2개월 먼저 전사하게 되는데 이때가 박종선씨가 5살 때다.

■박경래 (1927~1950년 박종선의 작은아버지)

'홍대장 이라고 불리던 지휘관을 따라 노고단에서 습격 작전을 펼치다 구례 산동면 당동에서 전사한다. 이때가 1951년 9월 13일이다.

■가족의 비극사

박종선씨는 5살때 차례대로 두달 간격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작은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다. 세분 모두 공식명칭은 애국단원이었다. 그러나 당시 어린 그에게 선친들의 죽음은 공식적인 장례의전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어린 아이였을지라도 기억은 날카롭고 깊게 평생의 흉터를 남긴다. 황망한 일이자 억장이 무너지고 애가 끊어지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박종선씨는 "한 마디로 비극의 가족사였다"고 말한다.

선친들을 졸지에 잃어버린 후손의 댓가는 혹독했다. 박종선씨는 5살 이후 큰집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아 생활했으나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남의 집 머슴을 하며 살았다. 어린 시절이었으나 어느 누구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6살 무렵 어느 추운 겨울엔, 땔감이 없어 남의 나무 밑에서 나뭇가지를 줍다가 주인에게 잡혀 지독하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눈물은 얼어붙어 나오지 않았고, 배가 고파 흐느낌도 입으로 마음껏 토하기 어려운 참담한 유년기 시절이었다.

자라면서 슬픔과 외로움을 견디려고 노래를 많이 해서 그런지 그는 노래 솜씨가 좋았다. ‘제2의 배호가 될 놈’이란 말까지 들었고 음반작업까지 했으나 그간 보살펴 주신 큰집 할머니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20살이 되던 해, 당시 지리산 자락에서 혼자 사시던 큰 할머니를 위해 꿈을 접고 귀향한 그는, 1987년 큰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까지 모시고 함께 살았다. 그는 봉양하던 그 시절이 행복한 시절이었다 회상한다.

선친들의 영현은 59년 동안 전남 구례군 산동면 선산에 묻혀 있다가 10년 전 박종선 씨의 이장 신청으로 대전 현충원 경찰묘역에 나란히 안장됐다. 당시 공식 경찰은 아니었지만 공로를 세분 모두 인정받은 것이다.

뒤늦게 현충원으로 이장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합장하면서 선산에서 섬기던 선조를 현충원에 모시기로 했다"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싶어 이장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매년 현충원을 찾는 그는 올해도 할아버지 내외, 아버지 내외, 작은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가족 묘역 묘비 앞에서 눈시울을 붉힌다. "안타깝게 돌아가셨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모실 수 있게 돼 감개무량하다"며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몸바친 수많은 유공자와 함께 계시게 돼 하늘나라에서도 모두 기뻐하실 것"이라고 한다.

국립대전현충원의 한 관계자는 "3부자가 경찰묘역에 안장된 사례는 처음"이라며 "이분들의 업적과 애국심이 널리 알려지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캠프 그레이엄(Camp Graham) 선교본부는 1920년부터 지리산 노고단 능선(해발 1,500m부근) 전남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에 52개의 선교사 수양관이 박태문씨 등 산동면 주민들에 의해 지어졌다.
캠프 그레이엄(Camp Graham) 선교본부는 1920년부터 지리산 노고단 능선(해발 1,500m부근) 전남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에 52개의 선교사 수양관이 박태문씨 등 산동면 주민들에 의해 지어졌다.


■통일의 가족사

이들의 항일. 반공. 통일 가족사는 통합의 세계관을 다루고 있기도하다. 일제석호길 시대 지리산 노고단에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만든 선교본부가 있었다. 캠프 그레이엄(Camp Graham) 이다. 한마디로 산 깊은 곳에 항일 거점 산채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3.1운동지원으로 독립선언문초안을 만들고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등 항일에 적극 가담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선교사 자녀를 포함 약 70 여명의 공동체가족들이 원인 없는 병으로 죽자 미국 남장로교 본부에서는 이를 일본의 생물학적 만행으로 판단했다. 철수 명령이 왔으나 50여명의 선교사는 죽어도 조선을 위해 살고 죽어도 조선에서 죽겠다며 1921년 일본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해발 1,507미터 높이인 지리산 노고단에 선교사 거주지 57채를 만든 것이다. 신사참배 거부. 독립운동지원, 한글보급 등에 힘쓰다 1940년 일본군에 의해 강제퇴거 당할 때 까지 호남주민과 박종선씨 선친들의 희망의 보루 역할을 하였다.

미남장로교(南長老敎) 또는 미합중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소속 레이놀즈(W.D.Reynolds, 이눌서, 1867~1951) 선교사는 1892년 조선에 와서 '호남 선교 7인의 선발대'라 불리는 미국 남장로회의 개척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전주를 중심으로 호남지역의 남장로회 선교지를 개척한 그는 한글맞춤법 연구. 구약성경 번역 등을 했으며 조선 후기 대표적 민속학자인 지리산 구례 출신 매천 황현과 교류하며 조선을 사랑하게 되었고 매천이 항일합방에 반대해 자결하자 충격을 받고 더욱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게 된다. 또한 로버트고이트 선교사는 캠프 설립을 역설하여, 당시 전국의 항일선교사와 독립운동가들이 지리산 노고단에 집결하게 만들었고, 함께 한 50여명의 선교사들은 일본의 제국주의 만행에 적극 저항하였고 한편으론 공산주의 단점에 대해서도 교육하였다.

역사는 뿌린대로 거둔다. 선교사들의 산채운동에서 애국을 배운 할아버지가 있었고, 그 아래 선대에는 배운대로 그 길을 죽음으로 함께 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피를 이어받은 박종선씨와 그 아들 박성대는 '죽음의 길에서 대통일의 생명의 길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운동은 행동이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열매를 맺는다. 때론 생명의 열매로 때론 사망의 열매로.. 이들 가족이 한국의 참다운 저항정신을 잇는 명문애국가족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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