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2024.05.22(수)
예전 을지면옥 간판과 현재 을지면옥 간판 [사진=김선영 기자]
예전 을지면옥 간판과 현재 을지면옥 간판 [사진=김선영 기자]
[비욘드포스트 김선영 기자]
1985년 문을 연 뒤 37년간 운영해 오며 서울에서 손꼽히는 평양냉면집으로 회자되는 을지면옥은 2022년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으로 인해 기약 없이 문을 닫았다.

주변 가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철거를 위한 공사 준비가 진행되는 중에도 꿋꿋이 영업을 이어가던 을지면옥이 결국 문을 닫을 즈음, 수년째 이어지고 있던 철거와 이전 소문으로 다소 무뎌진 단골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며 이전 계획이 없는지 물었다. 철거가 확정되고 을지면옥이 영업 종료를 고하는 시점에도 어디로 이전하는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평양냉면 마니아들이 마음 한 켠 허전함을 안고 다른 냉면집을 전전하며 2년이 흐른 올 봄, 기다리던 소식이 찾아왔다. 을지면옥이 낙원동 종로세무서 인근에 5층짜리 건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무더위가 오기 전에 시원한 냉면을 대접하겠다"는 을지면옥 측의 멘트까지 곁들여져 평양냉면 마니아들의 심장은 쿵쿵 뛰기 시작했으리라.

을지면옥은 지난달 22일 영업을 재개하며 여름이 오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비교적 한가할 것 같은 시간을 골라 방문했으나, 2년간 벼르던 평양냉면 마니아들이 모두 한달음에 달려온 듯 어느 시간에도 줄이 길었다. 초조한 눈길로 가게 안 테이블이 비워지는 걸 바라보며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 가늠하다가 아직도 뒤로 더 길어지는 줄을 보며 이 정도라도 다행이라며 안도한다.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전에 썼던 것으로 보이는 '을지면옥'이라고 적힌, 오래된 간판이 눈에 띈다. 새 간판도 이전 간판의 글씨체를 본뜬 모양새다.

제법 기다려 입장하자 눈에 띄는 건 '선주후면'을 몸소 실천하는 단골들의 테이블 위 초록 소주병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행복한 미소를 띠며 냉면을 맛보고 있었다. 간혹 '맛이 달라지진 않았나' 매의 눈으로 육수를 살피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맛을 보는 손님도 있다.

냉면과 제육을 주문했다. 냉면 한 그릇의 가격은 1만 5,000원, 소고기로 만든 수육은 3만 5,000원, 돼지고기로 만든 제육은 3만 원이다.

2년 전 마지막 영업일 기준의 냉면 가격은 1만 3,000원, 수육 3만 원, 제육 2만 8,000원이었으니 대략 2000원 이상 가격이 오른 셈이다. 2024년 5월 현재 평양면옥의 냉면 가격은 1만 5,000원, 을밀대 1만 5,000원, 우래옥 1만 6,000원으로 평양냉면집의 가격은 대동소이하다.

누리꾼들은 평양냉면 이야기만 나오면 "갈비탕도 아니고 고기 두 점에 달걀 반쪽, 면뿐인 냉면 가격이 이게 맞냐", "육수는 맹물로 우리나, 국물 우리는 데 고기가 얼마나 사용되는지 아나"며 갑론을박 중이다.

을지면옥의 평양냉면과 제육 한 접시 [사진=김선영 기자]
을지면옥의 평양냉면과 제육 한 접시 [사진=김선영 기자]


1만 5,000원. 이 글에서는 냉면 한 그릇 값으로 적당한지에 대한 것보다 점심 한 끼 가격으론 부담스러울 순 있지만, 기자가 좋아하는 이 맛을 위해서는 별수 없이 이 가격을 지불하고 먹겠다는 말로 갈무리하고 싶다.
늦은 점심시간에 방문해서인지 면수는 숭늉처럼 진하고 구수했다. 면수를 처음 접했을 때, 따뜻한 육수를 기대하며 마셨다가 엉뚱한 맛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찬 육수를 들이켜다 추워질 때 한 모금씩 마시면 몸이 풀어지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냉면 그릇을 받자마자 면을 풀지 않고 그대로 들어 육수를 절반쯤 마셨다. 짭짤하면서도 육향 진한 육수에 혀가 잠기게 천천히 흘려 넣으면 자극적인 맛들에 지쳐 미뢰 아래 옹송그리고 있던 새로운 미각이 깨어나는 기분이다.

염도가 낮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음식을 먹을 땐 평소 을지면옥 수준의 염도를 좋아했지만, 왠지 평양냉면만은 이보다 조금 염도가 낮은 필동면옥을 최고로 치던 기자다. 이날 맛본 육수에서는 필동면옥이 떠올랐다. 찬찬히 맛을 음미하며 마신 육수로 오장육부가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어제 술을 마셨다면 알코올 기운이 전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육수 리필을 요청한 뒤 다시 새 냉면이 되면 그제야 면을 풀어 면과 고명을 맛본다.

돌아온 냉면에 대해선 '예전 맛 그대로다', '육수가 깊어졌다', '육수가 싱거워졌다', '면이 가늘어졌다' 등 각기 다른 평을 들을 수 있었다. 기자 역시 기억하는 맛과 약간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큰 틀에선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훌륭한 육수라고 생각했다. 육수가 새 부엌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때쯤 다시 한번 방문할 계획이다.

제육은 상대적으로 변수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여전히 맛있었지만, 역시 가격은 조금 부담스럽다. 여전한 감칠맛의 양념장에 찍어 몇 점을 연달아 먹으니 옆 테이블의 소주가 부러워졌다.

나름 흡족한 식사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서니 들어올 때보다 줄이 더 길어졌다. 배가 불러 너그러워진 시선으로 바라보니 다들 오랜만에 돌아온 옛 친구를 만날 생각에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걱정마세요. 그 친구, 여전해요'

ahae@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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