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신에서 본질의 비틂과 뒤집기, 장르 간의 혼합으로 신선함을 안긴 작가들이 있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낯섦과 익숙함이 조화롭게 버무려지는 ‘크로스 오버’와 비슷하다. 캔버스 위 익숙했던 존재들이 낯설게 등장하고, 전혀 다른 두 장르가 만나는 지점에서 관객들은 생경한 즐거움을 맛본다. 기존 문법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 세계를 구축한 대표 아티스트 5인을 소개한다.
자유로운 표현으로 수묵화의 스펙트럼을 넓힌 신영훈
한지와 먹의 농담만이 수묵화의 전부는 아니다. 고상한 취향을 지닌 이들만 좋아할 것이라는 편견도 오해다. 신영훈 작가 작품 앞에서는 수묵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잠시 내려놔도 좋다. 그는 우리가 알지 못 했던 수묵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작가다. 개인전 <은유적 클리셰>(2017)에서 그는 동시대 여성을 수묵의 범주 안에서 감각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이목을 끌었다. 곱게 단장한 한복 입은 여인이 아닌 속옷만 걸친 채 묘한 표정을 짓는 현대 여성이 그림에 등장하는데, 흔히 기대하는 동양화 속 여성의 이미지를 보기 좋게 뒤집음으로써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또 다른 개인전 <Director’s Cut>(2019)에서는 마치 풍경 사진 같은 색다른 수묵화를 공개했다. 그가 선택한 바탕지는 광목천이었다. 한지 대신 광목천에 물감과 먹으로 제주도의 숲을 정교하게 채색해 수묵의 새로운 표현법을 보여줬다.
수묵의 매력을 담은 흥미로운 협업 작업도 선보였다. 역사소설 <초한지>의 표지 일러스트 작업을 비롯해 LS일렉트릭의 그린에너지 사업을 산수화에 녹여낸 ‘LS일렉트릭 산수화’ 시리즈,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아트웍, <해적>의 수묵화 포스터 등이 대표적이다.
손만 닿으면 예술로… 브릭 마이더스의 손 진케이
유년 시절 가지고 놀던 네모반듯한 레고블록이 어떻게 ‘예술품’으로 거듭나는지 궁금하다면 국내 1호 브릭 아티스트 진케이의 작품을 감상해 보길 추천한다.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수십 만개의 브릭을 쌓아 완성한 그의 작품은 ‘레고= 장난감’이라는 편견을 단번에 허문다. 그 역시 처음에는 레고를 ‘놀이’로 시작했다. 그러다 점차 설명서대로 레고를 조립하는 수준을 넘어 창작의 단계에 다다랐다. 그에게 레고 브릭은 한계 없는 훌륭한 미술 재료였던 셈.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대표작으로는 2017년 태국의 한 쇼핑몰에 설치한 BTS 브릭 아트월과 2019년 청와대에도 초청받은 백범 김구 선생의 브릭 초상화를 꼽을 수 있다. 인체의 아름다운 곡선을 레고로 표현한 ‘다이브’란 작품 역시 주목받았다. 묘사에 탁월한 그의 작품은 다각도로 즐겨야 한다. 특히 투명 브릭은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모서리가 둥글게 보이기도 하고, 브릭끼리 서로 겹치면서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내 작품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인다. 브릭 아트의 매력이자 감상 포인트다.
그는 오는 10월, 창원 조각 비엔날레를 통해 처음으로 미술계 문을 두드린다. 미디어 아티스트와협업해 한국의 전통적 요소가 가미된 특별한 작품을 보여줄 계획. 인천시와 함께 사람들이 버린 폐브릭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다.
‘사진 조각’이라는 전무후무한 개념을 탄생시킨 권오상
‘사진 조각’이라는 신新 장르를 구축해 세계적 작가로 거듭난 권오상. 그의 조각품은 가볍다. 대리석, 브론즈 등 무거운 전통 조각 재료 대신 사진으로 조각품을 만든다. 대상을 다양한 시점에서 사진 찍고 인화하여 콜라주 기법으로 이어 붙이는 방식이다. 재료도, 무게도 반전 있는 이 조각품은 세계에서 통했다. 이미 학부 시절부터 사진 조각이라는 개념을 잡고 있던 그는 이를 발전시켜 선보인 ‘데오도란트 타입’ 시리즈를 시작으로 미술계에서 떠오르는 스타작가로 부상했다. 이어 ‘더 플랫’, ‘더 스컬프처’, ‘뉴 스트럭처’ 등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견고히 다졌다.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30여 차례가 넘는 개인전을 가지며 스타성과 작품성을 증명했다.
세계적 브랜드 및 뮤지션과 협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2008년, 영국 록밴드 킨의 멤버 각각을 사진 조각으로 만들어 완성한 <Perfect Symmetry> 앨범 재킷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외신의 주목을 받았다. K팝 아티스트 GD를 주제로 한 작품 ‘무제의 지드래곤, 이름이 비워진 자리(2015)’도 화제였다. 2020년에는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와 특별한 연을 맺었다. 펜데믹 시기에 우리 삶에서 멀어진 것들에 대한 고민을 정물 조각에 녹여낸 ‘에르메스의 윈도우 디스플레이(2020)’ 작업을 선보였다. 최근에는 크리에에티브 그룹 아워레이보와의 협업으로 ‘아워세트:아워레이보X권오상’전에 참여했다.
‘제2의 백남준’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이이남 작가는 한국의 미디어아트의 선구자다. 포스트 백남준으로 불리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신윤복의 ‘산수화’같은 고전 원작에 최신 미디어 기술과 자신만의 감각을 더한 작품들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조르주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활용한 ‘크로스 오버 쇠라’와 모나리자를 재해석한 ‘신-모나리자’ 등이 그의 대표작. 그림 위에 영상을 투영시켜 새롭게 탄생한 움직이는 서사에 관객들은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다. 그는 국내는 물론 해외 유수의 아트 페어와 미술관에서 인정받으며 폴란드, 룩셈부르크, 대만 등 해외 전시에 꾸준히 참여했다. 특히 코로나 상황에서도 언택트 전시에 잇따라 참여하며 관객들과 활발히 만났다. 홍익대학교에서 주관한 비대면 온라인 전시 ‘2020 Hyper-Experience(초-경험)’전에서 사람 검출 인공지능을 활용해 실시간 상호 소통하는 작품 ‘나비’를 선보여 뜨거운 반응을 이끌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도심 속 가까이에도 있다. 홍대, 합정, 숭례문을 지나갈 일이 있다면 중앙버스정류소의 ‘스마트 쉘터 미디어 파사드’를 유심히 볼 것.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크로스오버 쇠라' 등 총 5점의 미디어아트가 전시돼 있다. 좀 더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다산미술관에서 이이남 초대전 ‘다산藝’이 9월15일까지, 화성ICT생활문화센터에서 ‘이이남 미디어아트展 2022 화성오디세이’가 10월20일까지 열린다. 세기의 작품인 ‘신-모나리자’를 직접 감상할 수 있음은 물론 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별과 우주 등 흥미로운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논스톱 드로잉 쇼! ‘라이브 드로잉’의 창시자 김정기 작가
밑그림이 없는 즉석 그림, 일명 ‘라이브 드로잉’ 장르를 탄생시킨 김정기 작가 역시 기존의 드로잉 문법을 깬 작가로 통한다. 그의 그림에는 밑그림이 없다. 출발 신호와 함께 질주하는 달리기 선수처럼, 그는 검은 펜 하나를 쥐고 새하얀 종이 앞에 서서 머릿속에 담긴 상상 속 이야기를 완벽한 테크닉과 탄탄한 서사로 쓱쓱 채워 나간다. 2001년부터 만화가로 활동하던 작가는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참여, 대형 도화지에 라이브 드로잉을 선보이며 단번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대중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건 2016년 SK이노베이션 광고 캠페인이었다. 뒷모습으로 등장해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백지를 채우던 라이브 드로잉을 본 대중들은 환호했다. 2016년 파리 바스티유 디자인 센터에서 가진 첫 개인전은 최다 관람객을 기록할 만큼 해외에서도 주목받았다.
그는 현대미술과 상업미술 사이에서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 등의 미술작업은 물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라다이스>와 <제3인류>, 마블 <시빌 워>와 DC코믹스의 커버 아트까지, 유명 브랜드 및 아티스트와 협업했다. 작년에는 국내 최초 대규모 기획전 ‘김정기, 디아더사이드(The Other Side)’에서 작가의 예술적 궤적을 돌아볼 수 있는 초기 만화작품과 1,000여 점의 드로잉, 대형 회화, 영상, 사진 등 총 2,000여 점을 선보였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연상되는 ‘디아더사이드(2021)’와 전래동화를 재해석한 ‘해님달님(2021)’ 등 신작도 공개해 팬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