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을 강조하는 회사와 안전한 회사는 다르다

그러나 안전을 입으로 강조하는 것과 직원들이 실제로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 금속가공 공장에서 프레스 작업 중 직원의 손이 크게 다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현장에 파견된 감독관은 규정에 따라 안전관리 서류부터 꼼꼼히 살폈다.
월별 안전교육 일지, 참석자들의 빼곡한 서명, 보호구 지급 대장까지 서류상으로는 단 하나의 빈틈도 없었다. 겉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는 모범적인 사업장이었다.
진짜 문제는 사고가 발생한 프레스 기계 자체에 있었다. 작업자의 손이 위험 반경에 들어가면 즉시 기계를 멈추도록 설계된 자동 감지장치가 무려 석 달 전부터 꺼져 있었던 것이다.
장치를 켜두면 조금만 부주의해도 기계가 자꾸 멈춰 서서 하루에 할당된 생산 목표량을 도저히 맞출 수 없다는 핑계였다.
현장 반장도 알고 있었고, 공장장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위험을 알면서도 그 누구도 선뜻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회사는 서류상의 안전교육은 빠짐없이 완수했지만, 정작 생명이 걸린 ‘안전한 작업장’은 철저히 방치했다.
■ 서명으로는 결코 위험이 줄지 않는다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회사 측의 해명은 기시감이 들 정도로 비슷하다.
안전교육을 철저히 실시했고, 수시로 안전수칙을 공지했으며, 보호구 착용도 거듭 지시했다고 항변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교육 일지에 기계적으로 서명을 받았다고 해서 육중한 기계의 위험성이 저절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조심하라는 말만 허공에 백 번 외치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위험한 설비 하나를 즉각 개선하는 편이 훨씬 확실하고 효과적인 대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현장에서 안전관리는 형식적인 교육 횟수와 점검표의 '체크 마크'로만 평가된다.
사고가 나면 보여주기식 교육을 한 번 더 실시하고, 면피용 서류를 한 장 더 만들며, 억지 서명을 한 번 더 받아내는 식이다.
그러는 사이 안전관리는 ‘위험한 현장을 개선하는 실질적인 행동’이 아니라, 그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서류를 채우는 행정업무’로 초라하게 변질되고 만다.
■ 직원은 사장의 말보다 '선택'을 본다
중소기업의 열악한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늘 인력과 자금은 턱없이 부족하고, 코앞에 닥친 납기 압박은 목을 조여온다.
전담 안전 관리자를 따로 둘 여력이 없어, 한 사람이 생산과 품질, 안전까지 일당백으로 도맡는 곳도 허다하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경영자가 제한된 자원을 어디에 먼저 투입하는지가 그 회사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원이 부족할수록 무엇을 최우선으로 삼고 무엇을 뒤로 미루는지, 경영자의 '진짜 우선순위'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납기가 시급하다는 이유로 위험천만한 작업을 눈감아주는 사장.
일감이 줄어 여력이 없다며 필수적인 설비 개선을 기약 없이 미루는 관리자.
위험을 감지하고 스스로 작업을 멈춘 직원을 조직 분위기 흐리는 예민한 사람 취급하는 문화.
이런 회사의 공장 벽에 걸린 ‘안전제일’이라는 거창한 현수막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직원들은 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의 구호보다, 위기와 선택의 기로에서 사장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를 뼈저리게 주시한다. 그리고 그 찰나의 선택을 통해 회사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간파한다.
■ 법이 없었다면 과연 안전에 투자했을까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두고 경영계의 볼멘소리가 적지 않다. 중대한 산업재해가 발생하고 법에서 규정한 안전·보건 확보 의무 위반이 확인되면, 대표를 포함한 경영책임자가 무거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24년부터 상시근로자 5인 이상 사업장까지 적용 범위가 전면 확대되면서, 영세한 작은 회사일수록 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충분히 일리 있는 하소연이다. 인력과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이 실효성 있는 안전관리 체계를 제대로 갖출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두터운 지원과 세심한 제도 개선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냉혹한 숫자 앞에서는 잠시 변명을 멈추고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일터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598명에 달했다. 사망자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5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몹시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법 때문에 기업 경영이 너무 힘들어졌다는 푸념은 사방에서 들리는데, 왜 위험한 현장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오랜 작업 방식을 뜯어고치고 생산의 우선순위를 안전으로 과감히 바꿨다는 미담은 이토록 드물까.
만약 그 엄격한 법마저 없었다면, 기업들은 과연 지금만큼이라도 안전에 비용과 노력을 투자했을까.
물론 맹목적으로 처벌만 피하려다 보니 현장의 서류 더미만 두꺼워지는 부작용 또한 정답은 아니다. 단순히 법의 테두리를 지키는 것과, 직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진짜 안전한 회사를 만드는 것은 결코 같은 일이 아니다.
법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선일 뿐이다. 그 앙상한 기준을 넘어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한 일터를 가꾸는 것은 결국 온전히 경영자의 철학과 의지에 달린 몫이다.
■ "위험합니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멈출 수 있는가
현장의 위험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그곳에서 일하는 현장 직원이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평소와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도, 딛고 선 발판이 불안하게 흔들린다는 것도 그들의 오감이 가장 먼저 감지한다. 그 현장의 절박한 위험 신호가 경영진에게 가감 없이 전달되고 즉각적인 실제 조치로 이어지느냐에 회사의 진짜 안전이 담보된다.
“반장님, 이거 너무 위험한데요?”라고 어렵게 입을 뗐다가, “그래서 오늘 밀린 물량은 네가 다 책임질 거냐?”라는 싸늘한 핀잔을 들은 직원은 다음부터 굳게 입을 닫아버린다.
그래서 경영자가 흔들림 없이 분명하게 정립해야 할 원칙이 있다. 빡빡한 납기와 직원의 안전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 우리 회사는 과연 무엇을 최우선으로 할 것인가.
과감히 작업을 멈춘 직원이 생산 일정에 차질을 빚은 '말썽쟁이'가 아니라, 회사의 더 큰 재앙을 막아낸 '숨은 공로자'로 인정받고 칭찬받는 조직 문화여야 한다.
그 기준은 그럴듯하게 인쇄된 사내 규정집이나 요란한 구호만으로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용기 내어 처음 위험을 알리고 기계 작동을 멈췄을 때, 사장이 보여주는 즉각적이고 진정성 있는 '반응'에 따라 조직의 진짜 안전 문화가 결정된다.
■ 가장 위험한 일 하나부터 차근차근
안전을 바라보는 시야의 범위도 훨씬 넓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끔찍한 산업재해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기계에 몸이 끼이는 가시적인 사고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고된 동작을 하루에 수천 번씩 반복하다 서서히 병들어가는 근골격계 질환, 시끄러운 소음과 매캐한 분진이 낳는 만성 직업병, 그리고 과도한 업무량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직원의 정신건강 역시 회사가 책임지고 살펴야 할 중대한 안전 문제다.
당장 눈에 띄는 사고가 나지 않는 회사와, 직원들이 몸과 마음을 온전히 지키며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회사는 질적으로 다르다.
산적한 모든 문제를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장 현장에서 가장 위험해 보이는 작업 딱 하나부터 집중해서 바꾸면 된다.
그 고된 작업을 매일 묵묵히 수행하는 직원에게 진지하게 다가가 무엇이 가장 위험하고 불편한지 묻고,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했던 아찔한 아차사고(Near Miss)가 발생하면 놀란 가슴만 쓸어내리지 말고 끝까지 추적해 근본 원인을 뿌리 뽑아야 한다.
안전교육 역시 지루하게 수칙만 줄줄 읽어주는 시간 낭비보다, 경영자와 직원이 다 함께 현장을 샅샅이 돌며 숨은 위험요인을 보물찾기하듯 찾아내는 실습이 백 배는 더 효과적이다. 안전보건공단의 전문적인 컨설팅과 중소기업 시설 개선 지원사업 등 외부 자원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서두에 소개한 공장의 사장은 직원의 손이 다친 사고 뒤, 임의로 감지장치를 꺼버린 작업자를 색출해 문책하지 않았다. 대신 현장으로 내려가 직원들에게 왜 생명줄 같은 장치를 끌 수밖에 없었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물었다.
진짜 원인은 무리하게 짜인 '생산계획' 그 자체에 있었다. 잦은 기계 멈춤을 감수하면서 장치를 켜놓고 정상적으로 작업하면, 애초에 하루 목표 생산량을 도저히 맞출 수 없도록 비현실적인 작업계획이 강요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은 그 즉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생산계획의 목표치부터 대폭 하향 조정했다. 그 단호한 조치 이후, 그 공장에서 감지장치가 임의로 꺼지는 일은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안전모를 턱 끈까지 단단히 쓰라고 잔소리하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로 위험한 설비를 뜯어고치고, 눈앞의 납기보다 직원의 생명을 우선시하며, 현장의 껄끄러운 문제 제기를 기꺼이 수용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과 경영자의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건강한 안전문화가 말뿐인 헛된 구호만으로는 결코 싹틀 수 없는 이유다.
사고는 늘 차가운 현장에서 발생하지만, 그 똑같은 사고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만드는 진짜 주범은 회사의 묵인된 관행이다. 그리고 그 견고한 관행의 고리를 끊어내고 바꾸는 혁신은 언제나 경영자의 단호한 ‘선택’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bjlee@beyondpos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