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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범의 千글자]...지워서 기억하기

이순곤 기자

입력 2026-05-22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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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그가 누구인지, 함께한 시간은 어땠는지, 헤어진 이유는 무엇인지, 기억의 중심이 되는 내용도 제각각입니다. 스포츠업계에서 사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남겨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용어부터 직관적이고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라 익숙합니다. 동상, 자서전, 기념관, 재단 같은 걸 남겨서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반면 지워서 기억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일단 용어부터가 모순적입니다. ‘지우다’와 ‘기억하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가치로 함께 사용하기 힘든 단어입니다. 영구결번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거나 기억할 가치가 있는 선수가 사용하던 등번호를 지워버려서 해당 팀에서는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야구가 대표적인데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선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 양키스의 루 게릭 같은 선수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특히 재키 로빈슨이 현역 시절 달았던 42번은 다저스뿐 아니라 메이저리그 전 구단에서 영구결번인 유일한 번호입니다. 현재도 42번 등번호 선수가 없고 앞으로도 누구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단 하루 예외가 있는데 매년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이 194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날인데 이날 경기에 나서는 메이저리그 모든 선수들은 자기 등번호 대신 42번을 달고 경기에 출전합니다.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횡행하던 시대에 최초의 흑인선수로 데뷔해 은퇴할 때까지 차별과 싸워야 했던 재키 로빈슨의 업적과 정신을 리그 전체가 오래, 분명하게 기억하고 기념하자는 의미에서 4월 15일 이벤트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한국은 롯데 자이언츠에서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쓸 수 없고,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이승엽이 썼던 36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구결번’은 번호를 지워 없앰으로서 예우와 기억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단순히 대상을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그 빈 자리를 의식 속에서 계속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흔히 기억을 저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기억은 금지함으로써 더 강력하게 유지됩니다. 금지는 반복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용하지 않기로 한 자리, 입에 올리지 않기로 한 이름, 비워 둔 공간 같은 것들은 지속적으로 현재를 자극합니다.

세상은 말 그대로 예상을 뛰어넘는 다사다난한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좋든 싫든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기억하는 방식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겨서 기억할 것인지 지워서 기억할 것인지. 예를 들어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헌법을 파괴하고 시민을 짓밟은 자들의 이름은 남길 것인지, 지울 것인지. ^^*

[비욘드포스트 이순곤 기자] sglee640@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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