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한국과 미국 대기업의 회의실 위로, 거의 동시에 같은 풍경이 번지고 있다. 신입 공채는 줄고, 인턴 자리는 사라지며, 과거 주니어들이 맡아 하던 자료 정리·문서 초안 작성·보고서 검수 등의 업무를 AI 에이전트가 조용히 가져갔다.
사람들은 이 변화를 두고 "AI가 단순 업무를 줄여 효율성을 높여준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효율성의 언어다. 그러나 이와 똑같은 풍경을 5년 뒤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이름이 붙는다. 바로 '회사의 첫 칸이 사라지고 있다'는 서늘한 경고다.
◆ 데이터가 보여주는 첫 번째 신호
이러한 풍경은 이미 구체적인 숫자로 측정되기 시작했다.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SDEI)의 에릭 브리뇰프슨(Erik Brynjolfsson) 교수 연구진이 2025년 발표한 미국 노동시장 분석 보고서는 한 가지 뚜렷한 패턴을 가리키고 있다.
생성형 AI 도입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직군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곳이 바로 '신입(Entry-level)'의 자리였다는 사실이다. 반면 같은 직군의 시니어급 인력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AI가 일자리를 단순히 무차별적으로 줄인 것이 아니라, 사다리의 '가장 아랫단'을 골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대졸 청년의 실업률이 전체 실업률을 추월하기 시작한 2024년 이후의 흐름,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신입 채용 축소, 그리고 한국 대기업들이 잇달아 발표한 정기 공채 폐지와 수시 채용 전환 역시 모두 동일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지난 한 시대 동안 대학 졸업장이 보장해 주던 '회사 안에서의 첫 번째 자리'가 통계 속에서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중이다.
◆ 보이지 않는 부채: 사라진 도제의 시간
회사는 단 한 번도 '학교'가 아닌 적이 없었다. 신입 사원은 얼핏 의미 없어 보이는 단순 업무를 반복하며 조직의 언어를 체득하고, 보고서 한 줄을 다듬는 과정 속에서 의사결정의 결을 익히며, 시니어의 옆자리에서 조직의 침묵하는 규칙을 읽어낸다.
이 시간이 5년쯤 밀도 있게 쌓였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주체'로 성장한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이 자랑해 온 탄탄한 부장·임원층의 두께 역시 따지고 보면 이 길고 지난한 '도제(徒弟)의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진짜 문제는 AI가 이 학습 통로의 입구를 가장 먼저 장악해 버렸다는 점이다. 기초 자료 조사와 초안 작성은 더 이상 신입의 몫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일을 빼앗긴 자리에서는 시니어로 올라가는 계단 자체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단기적으로 회사는 '비용 절감'이라는 달콤한 영수증을 손에 쥘 것이다.
그러나 장기 대차대조표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항목이 새로 적히게 된다. 바로 '사라진 도제의 시간'이라는 부채다. 이 보이지 않는 부채는 5년쯤 지난 후에야 비로소 무거운 청구서가 되어 조직에 도착한다. 그때가 되면 회사는 당혹스럽게 묻게 될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이끌 부장급 인재는 이제 어디서 오는가?"
◆ 계단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해법은 단순히 신입 사원을 무작정 더 많이 뽑는 형태의 아날로그식 회귀가 아니다. AI가 이미 압도적인 효율로 흡수해 버린 일을 다시 사람의 손으로 돌려놓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바꾸어야 할 것은 '신입의 자리' 그 자체에 대한 정의다.
첫째, 신입의 업무를 '산출(Output)'이 아니라 '관문(Gateway)'으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 입사 첫해의 핵심 성과지표(KPI)를 단순 업무 처리량이 아니라 조직 학습량으로 설계하는 방식이다. 어떤 의사결정에 어떤 근거가 활용되는지, 중요한 회의에서 어떤 맥락과 결이 오가는지 신입 사원이 옆자리에서 '듣고 배우는 시간' 자체가 조직의 핵심 자산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둘째, AI를 신입을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입과 함께 시니어 옆자리에 앉히는 도구로 재배치해야 한다. AI가 자료를 신속하게 정리하면, 신입 사원은 그 정리된 데이터 위에서 시니어와 고차원적인 토론을 벌이는 구조다.
물리적인 노동 시간은 줄어들지 몰라도 대화와 사유의 밀도는 오히려 급격히 올라간다. 이를 통해 학습은 과거보다 훨씬 더 빠르고 깊게 일어날 수 있다. 신입을 밀어내는 자리가 아니라, 신입의 시야를 시니어의 높이로 끌어올리는 주춧돌로 AI를 활용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셋째, 시니어의 시간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 AI는 신입뿐만 아니라 시니어의 단순 업무 역시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시대다. 그렇게 확보된 여유 시간의 일부를 신입 사원의 옆자리에 의도적으로 배정하지 않는다면, 회사 안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지혜를 배우는 정통적인 통로는 영영 닫히고 만다. 시니어의 한 시간을 신입의 학습과 멘토링에 할당하는 일은 매몰 비용이 아니라, 조직의 미래 생존을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다.
◆ 5년 뒤의 회사를, 우리는 지금 만들고 있다
사다리는 결코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첫 번째 칸이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닳아 없어지다가, 어느 날 누군가 두 번째 칸에 발을 디디려다 허공을 헛디디는 충격적인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두가 그 파국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때 깨달으면 이미 늦다.
지금 눈앞의 효율성만을 좇아 신입의 자리를 성급하게 줄이는 결정은, 그 결정을 내린 주역들이 회사를 떠나고 없을 5년 뒤의 조직에 부메랑 같은 청구서로 반드시 돌아온다. 그렇기에 이 화두는 단순히 실무 인사부(HR)의 지엽적인 고민이 아니라, 기업의 생존을 책임지는 경영자의 절대적인 화두여야만 한다.
AI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핵심 질문은 "사람을 얼마나 더 줄여 비용을 아낄 것인가"가 아니다. "미래의 인재가 자라날 통로를 우리는 지금 어디에 확보해 두고 있는가"이다. 5년 뒤를 빛낼 유능한 시니어는 오직 오늘날 회사가 단단하게 남겨둔 첫 번째 칸 위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당신의 회사는 지금, 미래로 이어지는 '사다리의 첫 칸'을 확실히 쥐고 있는가.
bjlee@beyondpos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