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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이재연 박사의 '트렌드 경영'…다중 위기의 시대, 경영자가 지켜야 할 '조직의 고유시간'

입력 2026-07-27 07:48

글 / 이재연 경영학박사, (전) 서일대학교 이사장, (전) 숭의여자대학교 교수. / 사진제공=엘앤에이(주)
글 / 이재연 경영학박사, (전) 서일대학교 이사장, (전) 숭의여자대학교 교수. / 사진제공=엘앤에이(주)
[비욘드포스트 이봉진 기자] ◆ 모든 시계에 맞추려 할수록 조직은 자신의 시간을 잃는다
오늘날 경영자의 책상 위에는 너무 많은 시계가 놓여 있다. 인공지능(AI) 혁명이 재촉하는 '기술 변화의 시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이 흔드는 '지정학의 시계', 그리고 탄소중립과 기후위기가 요구하는 '장기 전환의 시계'다.

문제는 이 시계들이 저마다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속도로 도는 이 시계들의 알람이 한꺼번에 울릴 때, 많은 리더가 공통적인 실수를 범한다. 모든 외부의 시계에 완벽하게 발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 주주가 압박하면, 10년 전략도 분기 실적으로 쪼그라든다
외부의 요구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민첩하고 책임감 있는 대응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매몰된 조직은 결국 자신만의 방향타를 잃게 된다.

눈앞의 실적 방어에만 집중하다 보면 산업 생태계의 거대한 변화나 미래 성장의 기회를 놓치기 십상이다. 당장 닥친 불을 끄느라 정작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할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기업은 서로 다른 속도의 요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다중 위기(Poly-crisis)'의 시대를 살고 있다. 당장 이번 분기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거센 압박도 존재하고, 5년 혹은 10년 뒤를 내다보며 준비해야 하는 장기 과제도 공존한다.

여기서 리더의 진정한 역할은 쏟아지는 모든 요구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무엇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무엇에 긴 시간을 들여 철저히 준비할 것인지 냉철하게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조직의 중심과 방향성은 더욱 위태롭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 흔들리지 않는 중심축, ‘조직의 고유시간(Eigenzeit)’
그렇다면 위기를 돌파하는 강한 조직은 무엇이 다를까. 독일의 경영학자 블라고이 블라고에브(Blagoy Blagoev) 교수는 그 비결을 조직만의 고유한 시간 감각에서 찾는다.

아무리 외부 환경이 급변하더라도, 모든 요구에 휩쓸리지 않은 채 스스로의 속도와 우선순위를 굳건히 유지하는 힘이다. 그는 이를 ‘아이겐자이트(Eigenzeit)’, 즉 조직의 고유시간이라고 명명했다.

강한 조직은 외부의 거센 파도에 무조건 끌려다니지 않는다. 무엇을 먼저 실행할지, 어떤 사안은 서두르고 어떤 사안은 충분한 숙고의 시간을 가질지 스스로 결정한다. 다시 말해 외부 환경의 변화에 유연하게 반응하되, 조직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리듬은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외부의 변화를 독단적으로 무시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변화의 흐름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그것을 '우리 조직만의 고유한 방식과 속도'에 맞게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외부의 충격파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조직이 아니라, 어떠한 악천후 속에서도 무게중심을 잃지 않는 조직이 결국 더 먼 바다로 나아간다.

◆ 지휘자는 모든 악기를 같은 속도로 연주하게 하지 않는다
조직만의 고유한 리듬을 갖는다는 것이 곧 모든 부서와 업무를 똑같은 획일적 속도로 통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발 빠른 실행과 애자일(Agile)한 전환이 생명인 'AI·IT 개발 조직', 무결점의 안전과 꼼꼼한 검증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제조·품질 조직', 그리고 수십 년 후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야 하는 'ESG 경영 파트'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시간의 척도 속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를 억지로 하나의 속도로 맞추려 들면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은 무리를 하게 되고, 종국에는 조직 전체의 밸런스가 붕괴된다.

따라서 경영자는 오케스트라의 명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어떤 파트는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로 치고 나가게 하고, 어떤 파트는 안단테(Andante, 느리게)로 깊이를 더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조직원 모두를 획일적인 템포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다. 각기 다른 속도로 박동하는 부서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본연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결정적인 승부처에서는 거대한 교향곡처럼 하나의 목표를 향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모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율해 내는 것이다.

◆ 그래서 경영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금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불확실성의 시대에, 경영자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책무는 결국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조직의 확고한 중심을 지켜야 한다. 일시적인 시장의 유행이나 단기 실적에 대한 압박에 굴복해 조직의 근본적인 핵심 역량과 장기 전략마저 훼손해서는 안 된다. 당장의 트렌드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되, 조직이 닻을 내리고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북극성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서로 다른 속도를 인정하고 입체적으로 조율해야 한다. 모든 부서가 동일한 기어비로 달릴 수는 없다. 속도전이 필요한 전선과 지연전이 필요한 전선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리더의 역할은 이 이질적인 속도들을 억지로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엮어내는 데 있다.

셋째, 구성원에게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제공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치더라도, 우리 조직이 수호해야 할 핵심 원칙과 철학은 굳건하다는 강력한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심리적 안전망이 두텁게 깔려 있을 때, 구성원들은 막연한 불안감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새로운 혁신과 도전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외부 환경이 돌변하는 속도는 우리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그 거대한 파도에 '어떻게 대응하고 올라탈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시계들의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쫓기지 않고, 조직만의 고유한 리듬과 본질적인 방향성을 묵묵히 지켜나갈 때, 비로소 기업은 끝없는 소모적 추격전에서 벗어나 위대한 도약을 이룩할 수 있다.

질문해 보라. 당신의 조직은 지금, 외부의 시계에 쫓겨 헐떡이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들만의 고유한 리듬으로 힘차게 호흡하고 있는가.

bjlee@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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