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인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전씨(40대)는 두툼한 법원 서류 뭉치를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전씨는 소위 '빌라왕' 사태의 피해자들과 유사한 처지지만, 자신의 보증금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조치를 다 한 '적극적 임차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제도의 벽이었다.
◇"사비 털어 근저당까지 잡았건만"...법적 방어권 무너뜨린 변수들
전씨의 시계는 2024년 재계약 시점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집값이 전세금 아래로 떨어지는 '깡통 전세' 우려가 커지자, 은행은 기존 1억 6200만원의 전세자금 대출 연장을 거부했다. 전씨는 보증금 차액인 약 3300만원을 사비로 마련해 상환하며 대출 한도에 맞춘 1억 2900만원으로 계약서를 다시 썼다. 이어 자신의 사비 3300만원을 보전받기 위해 해당 주택에 5000만원의 근저당을 직접 설정했다. 스스로 방어권을 구축한 셈이다.
하지만 2025년 1월, 임대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임대인의 자녀를 포함한 1차 상속인들은 막대한 채무를 이유로 상속을 모두 포기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임대인 측에 '계약 종료 의사'가 전달되어야 하지만, 의사를 전달받을 주체인 상속인이 사라진 것이다. 전씨는 결국 변호사를 선임해 2차, 3차 상속인을 찾아 전국 동사무소를 뒤지며 공시송달 절차를 밟고 있다.

전씨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입한 '보증보험'에서 기인한다. 「전세사기피해자법」 제3조 제2항 제1호에 따르면, 임차인이 보증금 반환을 위한 보험에 가입하여 보증금 전액 반환이 가능한 경우 전세사기피해자 결정 대상에서 제외된다. 전씨는 보험 가입자라는 이유로 법적 '사기 피해자' 타이틀을 얻지 못했고, 이는 곧 금융 지원의 단절로 이어졌다.
현행법 제27조 제3항은 금융기관이 '전세사기피해자등'에 대해 채무 불이행 등록을 유예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특례를 부여한다. 그러나 전씨는 법적으로 '사기 피해자'가 아닌 '단순 보험금 지급 대기자'일 뿐이다. 은행은 특별법에 따른 금융 유예를 제공할 명분이 없다며, 당장 다음달 11일로 다가온 대출 만기 연장을 거부하고 있다.
◇25일 뒤면 신용불량자…성실한 시민을 벼랑 끝으로 모는 제도적 모순
사망한 임대인은 총 7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보험에 들지 않은 나머지 주택의 임차인들은 전세 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아 정부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보험료를 내며 자신을 보호하려 한 전씨는 "보험 가입자는 사기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논리에 막혀 신용불량 위기에 내몰렸다.
공시송달과 상속재산관리인 선임 등 국가가 정한 행정 절차 완료에는 최소 6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하지만 은행이 전씨에게 남겨준 시간은 고작 25일이다. 전씨는 "변호사까지 고용해 법적 절차를 밟고 있는데도 은행은 압류를 경고한다"며 "시간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데, 시스템이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성실한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과 보험이 오히려 그를 사각지대로 밀어넣고 있는 형국이다.
이종균 기자 jklee.jay526@beyondpos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