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본질은 ‘감상’에 있다

이와 같은 공식은 문학, 그 중에서도 특히 ‘시(詩)’에서 그대로 발견됩니다. 시는 매너리즘에 빠져 생명력을 잃어가는 우리 인생의 고비마다 삶의 본질을 일깨워주고, 감수성을 불러 일으키며, 올바른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토록 짧은 문장 안에 시인들은 저마다 연금술을 발휘하여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의식을 깨뜨립니다. 인용한 책의 제목을 따서 표현해 보지요. “시는 도끼입니다”. 시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어 ‘생각하기를 게을리하는’ 습성, 즉 타성(惰性)을 깨어내는 도끼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깨우침을 전달하는 <논어>의 구절 하나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논어>는 공자의 어록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생전에 공자가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지요. 이러한 논어의 제1단원은 ‘학이(學而)’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단원명도 <학이>라고 붙여놓았지요. ‘學而’라는 말은 ‘배움으로써~’라는 뜻입니다. 배움을 중시하는 공자의 정신에 잘 어울리는 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배움으로써, 그리고 배운 내용을 스스로 갈고 닦으면서 현실에 적용할 때’ 더욱 인간다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 논어의 제1단원이 전달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논어> 제1단원의 15번째 글에는 ‘始可與言詩已矣(시가여언시이의)’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이제 비로소 너와 함께 시에 관해 토론할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이야말로 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가장 빛나는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날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스승에게 질문합니다. “스승님,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은 자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하는 말이 맞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며, 부유하지만 겸허하고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고 볼 수 있겠지.” 그때 자공은 스승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절차탁마(切磋琢磨)’ 한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겠지요?” 이에 공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너와 비로소 시를 토론할 수 있겠구나! 내가 너에게 한 가지를 말해 주면, 너는 그 한 가지 일로써 다른 것을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에 이 구절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을 때, 마지막 구절에서 ‘이제 너와 비로소 시를 토론할 수 있겠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보름 가까이 시간 날 때마다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혼자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마침내 그 의미가 이해되었던 순간은 길을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시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닫는 순간이었죠. 길을 걷다가 머릿속에 해답이 떠올랐고, 그 순간 무릎을 탁 치면서 수천 년 전의 세계로부터 내게 전달된 그 메시지에 감탄했습니다. 가난한 선비가 현실적 조건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도를 추구할 수 있는 생활,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 여전히 겸손하게 예(禮)를 숭상할 수 있는 삶은 평소에 갈고 닦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름 이상 끙끙대다가 답을 얻게 된 것이었죠. 이 구절을 ‘절차탁마’라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포함하여 원문 그대로 번역해 보자면, 자공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군자는 뼈나 상아를 줄로 간 것처럼 또한 옥이나 돌을 쪼아서 모래로 닦은 것처럼 빛나는 것과 같다는 <시경>의 구절대로 평소에 선생님이 늘 말씀하신 ‘수양에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자세를 말한 것일까요?”라는 질문을 했고, 공자는 사랑스러운 제자의 깨달음을 반가워하며 ‘이제야 비로소 너와 <시경>에 관해 토론할 수 있겠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요컨대 공자가 자공을 칭찬했던 까닭은 ‘자공의 낭만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낭만이란 무엇일까요? 낭만이란 한 마디로 ‘상상력’입니다. 낭만이란 단순히 로맨틱한 분위기 따위를 의미하는 말이 아님은 물론이지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사물을 궁리하여 그 내밀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추론해 내는 것, 그 다음으로 그러한 의미에 담겨 있는 이치를 이해해낼 수 있는 상상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분석하고 추론하여 통찰할 수 있는 경지, 그것이 바로 공자가 시종일관 제자들에게 요구한 덕목이었을 것이고, 자공은 그와 같은 성취에 이른 셈이었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문학은 분석과 감상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궁극적으로 문학은 감상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화가의 그림을 분석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지요. 고3 시절에 수능시험을 준비하면서 내가 택한 전략은 19종이 넘는 문학 교과서 전반에 수록된 작품들을 시간 날 때마다 모두 찾아 읽는 것이었습니다. 예상문제집이나 기출문제집을 풀이하기도 했지만, 우선은 시나 소설 작품 안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들여다보자는 것을 골자로 시중에 발간된 ‘교과서 수록 문학집’ 따위의 책을 열 권 가까이 읽어댔던 기억이 납니다. 작품 수로만 따지만 수백 작품이 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의 이름조차 몰랐었지만, ‘인생은 예술을 모방한다’라는 그의 문장이 지닌 의미를 깨달았다고도 할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작품의 원문을 읽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세상을 만났고 작가와 대화했으며 ‘이야기하는 인류의 본성’을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유치환의 <생명의 서>,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윤동주의 <별 헤는 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같은 작품들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 만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를테면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유치환의 시(詩)는 고3 시절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내 영혼 깊이 각인된 문장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서>라는 이 묵직한 작품을 이해하려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라는 구절이라든가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것과 같은’ 상태가 무엇이며, 그 속에서 시적 화자가 지니고 있는 감정이나 정서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문학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기르면서 입시 문학의 출제원리에 따른 문제들을 풀이한다면 더욱 효과적인 학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25학년도 수능국어에 출제된 문병란 시인의 <꽃씨>라는 작품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 기인 기다림의 창변(窓邊)에 / 화려한 어제의 대화를 묻는다’
무척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구절이지요. 수험생들은 이러한 구절이 정서적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음미할 수 있을 때까지 작품을 감상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감상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영역을 그저 문제풀이로만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해당 구절은 시의 본질의 하나인 ‘성찰의 태도’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지요. 자연물을 매개로 인생사를 성찰하는 중년의 화자가 가을에 받은 꽃씨의 무게 앞에서 미숙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립니다. 자연으로 치자면 봄의 화려함과 여름의 무성함을 거쳐 결실의 계절 가을에 도달하듯이 그처럼 미숙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성숙한 현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때 주목해 보아야 하는 구절이 바로 “긴 기다림의 창가에 ‘화려한 어제의 대화’를 묻는다”라는 대목입니다. 시의 언어는 자유로운 정신으로부터 ‘비유’라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파격과 변형, 그리고 초월이 담긴 세계를 창조합니다.
화려한 꽃을 피워냈던 어제는 가을의 결실로 오늘 존재하는 꽃씨가 되었습니다. 이 꽃씨를 심는다는 것, 그것은 더 높은 차원의 성숙을 지향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꽃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봄인 줄 알았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지요. 오늘 자신의 내면에서 길어올린 소리를 듣는 성찰의 순간이 담겨 있는 구절입니다. 긴 기다림의 창가에 화려한 어제의 대화를 묻는 순간인 것이지요.
훈샘국어학원장 강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