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범의 포토에세이]...가을 문턱에서](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10200917250144646a9e4dd7f220867377.jpg&nmt=30)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괜찮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떨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 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유럽의 오래된 도시 풍경을 보면서 문정희 시인의 《도착》이라는 시를 떠올렸습니다. 나무는 잎을 다 떨구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역은 버스나 기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입니다. 인생에도 역이 있다면 어떤 단계나 전환점, 혹은 막다른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지나온 여정을 돌이켜 생각하고 돌아볼 수 있는 언덕 같은 곳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일이 잘 풀려서, 뜻밖의 행운도 좀 따라서 근사한 곳에 도착하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그럴듯하게 괜찮은 곳에 이르려고 사람들은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기대는 기대일 뿐, 애쓴 만큼 이루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도착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 낙담하고 때론 실망도 합니다.
시인은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어도, 내던져지고 거꾸러지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말합니다. 슬픈 일도 견디면 아름답고 꺼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벌레 먹고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설익고 한쪽이 썩은 열매를 쥐게 되더라도 눈물 나게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름 없는 역에 도착해도 괜찮다고.
도착한 여기가 바로 아름답고 빛나는 곳이며 넉넉하고 편안한 곳입니다. 삶이 어지러웠거나 슬픔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마치 벌레먹은 낙엽처럼 이지러졌어도 지나고 나면 나름의 추억과 행복이 있습니다. 이기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는데.
어제 오늘 사이에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져서 기온은 이미 가을 문턱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모두들 잘 살고 계시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도시도 돈과 사람과 상품만 모이고 흩어지는 곳이 아니라 이야기, 경험, 추억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나도 여기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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