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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범의 千글자]...제발 당기세요

입력 2026-04-04 08:15

[신형범의 千글자]...제발 당기세요
한국인이 가장 못 읽는 단어가 ‘당기세요’라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고 준법정신도 비교적 높은 수준인 우리나라에서 유독 ‘당기세요’라는 말은 왜 이렇게 철저히 무시당할까요. 못 읽는지 안 읽는지 아니면 읽었지만 무시하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유머게시판 같은 데 ‘제발제발 당겨주세요’ ‘꼭꼭꼭 당기세요’ 같은 스티커가 붙은 문을 찍은 사진이 올라오면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릅니다. 현실은 어떨까요. 일단 한국사회의 문은 밀어야 열리는 ‘미시오’와 당겨야 열리는 ‘당기시오’가 있는데 체감적으로는 밀든 당기든 모두 열리는 문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익숙하고 힘도 덜 들기 때문에 일단 밀고 보는 겁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문을 미는 데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일단 운동방향과 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물체는 진행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려는 관성이 작용합니다. 사람도 진행방향을 막고 있는 문을 만나면 진행방향으로 미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게 에너지를 덜 소모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문을 당기려면 일단 멈춰 서서 진행하던 역방향으로 운동에너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미는 에너지에 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는데 뇌는 본능적으로 이런 상황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또 당길 때는 잘 사용하지 않는 등근육이 필요한데 밀 때는 몸 전체를 쓰면 되니까 근육의 움직임이라는 관점에서도 미는 게 합리적입니다.

심리적 관점에서도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뇌는 생각하고 힘을 씁니다. 그러다 보니 움직이는 방향으로 힘을 쓰는 것이 편하고 익숙합니다. 문을 당기는 행위는 진행 중인 행동을 방해하는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심리학과 디자인을 결합한 인지공학 분야에서는 이런 현상에 대해 ‘행동유도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좋은 디자인은 사용자에게 가장 적절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기계나 장치를 사용자가 쉽고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없다면 그건 사용자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의 문제라는 겁니다. ‘당기세요’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문을 당겨서 열게 만든 디자인이 문제라는 관점입니다.

재미있는 건 반드시 밀어야만 열리는 문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건축에서 피난.방화기준 규칙에 따르면 문화 및 집회시설, 종교시설, 장례식장 또는 위락시설의 건축물은 당기는 문을 출구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위기상황에서 급히 건물을 빠져나와야 할 때 당기는 문은 시간이 더 걸려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건축물의 출구는 반드시 밀어서 열게 돼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모든 비상구도 반드시 밀어서 열게 돼있습니다.

반면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은행은 대부분 안으로 당겨서 나가게 문을 만듭니다. 혹시라도 강도가 들면 1초라도 지체하도록 설계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겁니다. 들어올 때는 문을 차고 들어와도 나갈 때는 꼭 손으로 당겨 열라는 겁니다. 사생활 보호가 관건인 호텔의 방문도 모두 안으로 열리게 만든 것도 흥미롭습니다. ^^*

sglee640@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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