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숙주와 금보성은 600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살아왔지만, 두 사람은 모두 한글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는 점에서 만난다.
신숙주에게 한글은 백성을 위한 문자였다. 세종대왕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음운을 연구하고 훈민정음의 체계를 정리하며 새로운 문자가 사회 속에서 올바르게 쓰일 수 있도록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역할은 창제보다 활용에 있었고, 철학보다 실천에 있었다. 문자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학자였다.
반면 금보성에게 한글은 문자 이전의 철학이며, 읽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예술이다. 그의 화면에는 단어도 문장도 없다. 자음과 모음은 해체되고 다시 태어나며, 색과 여백, 기하학적 구조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한다. 한글은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우주의 관계를 사유하는 조형언어가 된다.
이 차이는 시대의 변화이기도 하다.
15세기의 과제는 문자를 만드는 일이었다. 21세기의 과제는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정신을 어떻게 세계와 공유할 것인가에 있다. K-팝과 K-드라마가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세계에 알렸다면, 이제 한글은 현대미술을 통해 또 다른 문화언어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금보성이 말하는 “읽는 글자가 아니라 보는 철학”이라는 관점은 한글을 언어학의 영역에서 시각예술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 이는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오늘의 예술 언어로 확장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신숙주가 한글의 학문을 완성했다면, 오늘날 예술가들은 한글의 문화적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 문자의 기능을 넘어 회화와 설치, 공공미술, 디자인, 디지털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한글은 새로운 문화자산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주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신숙주의 생가가 있는 도시에서 한글을 주제로 한 현대미술 프로젝트와 개인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은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문화축으로 연결한다. 한글은 더 이상 교과서 속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형태로 창조되고 있는 살아 있는 문화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했고, 신숙주는 그 문자를 사회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리고 오늘날 금보성은 한글이 세계 현대미술 속에서 하나의 조형언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문자는 시대마다 새로운 옷을 입는다. 그러나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연결하고, 생각을 나누며, 문화를 만드는 힘이다.
신숙주의 한글이 조선을 바꾸었다면, 현대 예술가들의 한글은 세계와 소통하는 또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한글을 ‘읽는 문자’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가장 독창적인 시각문화의 자산으로도 바라볼 때가 되었다.
비욘드포스트 김민혁 기자 bp_kmh@beyondpos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