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김신 기자] 유럽 대형 유통사들이 전자가격표시기(ESL)를 매장 운영에 확대 적용하고 중국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해외 시장을 넓히는 가운데, 국내 유통업계의 ESL 전환은 여전히 개별 기업의 투자 판단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한 시장조사기관은 세계 ESL 시장이 2025년 약 22억달러 규모에서 향후 연평균 12%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다른 기관들이 제시한 성장률은 15~17%대로 차이가 있지만 시장 확대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공통적이다.
국내 시장에서 ESL 확산을 제약하는 요인 중 하나는 초기 투자비용이다. ESL을 도입하려면 전자태그뿐 아니라 통신망과 서버, 소프트웨어 등 관련 시스템을 함께 구축해야 하기 때문에 매장 수가 많을수록 초기 설비투자 규모도 커진다. 특히 투자 여력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중소·중견 유통업체에는 비용 부담이 도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 ESL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과 해외 영업을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국가 자본이 산업 육성에 직접 개입한 중국 반도체 산업과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ESL 분야에서는 민간 기업들이 가격과 공급 능력을 앞세워 해외 고객사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넓히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유통업체가 처한 경영 환경도 ESL 도입 필요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인건비 상승과 인력 확보 부담이 이어지는 가운데 종이 가격표를 수작업으로 교체하는 업무는 매장 수와 가격 변경 횟수가 늘어날수록 비용 부담으로 이어진다. 온라인 유통과의 가격 경쟁으로 오프라인 매장의 가격 변경 주기가 짧아지는 점도 매장 운영 효율화의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
다만 ESL 도입을 개별 기업의 투자 결정에만 맡길 경우 기업 규모에 따른 디지털 전환 속도의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투자 여력이 있는 대형 유통기업은 관련 시스템을 선제적으로 구축할 수 있지만 중소 유통업체는 초기 투자비 부담으로 도입 시기를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ESL 제조기업들은 저전력 설계와 배터리 수명, 통신 안정성 등의 기술을 기반으로 해외 시장에서 사업을 확대해 왔다. 향후 국내 시장의 전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제조기업의 기술개발뿐 아니라 ESL을 도입하는 유통기업의 투자 부담을 낮추는 방안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예를 들어 ESL 관련 설비투자를 디지털 전환 투자로 인정해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세제상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이 검토될 수 있다. 제조기업에는 연구개발(R&D)과 해외 진출 지원을 제공하고, 실제 ESL을 설치하는 유통기업에는 설비투자나 디지털 전환 관련 인센티브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다만 구체적인 세액공제 적용 여부와 범위는 현행 조세제도 및 관련 요건에 따라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유사한 정책 사례는 제조업의 스마트공장 확산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부는 중소·중견 제조기업의 스마트공장 구축과 고도화를 지원하면서 생산현장의 디지털 전환을 추진해 왔다. ESL 역시 기술 개발과 함께 실제 수요처의 초기 투자 부담을 어떻게 낮출지가 시장 확대를 좌우하는 변수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결국 ESL 시장의 경쟁은 제품 성능만으로 결정되기보다 가격과 공급 능력, 고객사 확보, 투자 여건 등이 함께 작용하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글로벌 유통업체들의 ESL 도입이 확대되고 해외 제조기업 간 경쟁도 치열해지는 만큼 국내에서도 유통산업의 디지털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관련 정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기술 경쟁력을 지원하는 공급 측 정책과 유통업체의 도입 부담을 낮추는 수요 측 정책을 어떻게 결합할지가 관건이다. 글로벌 ESL 시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의 기술 경쟁력이 실제 시장 점유율과 산업 생태계 확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의 범위와 방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비욘드포스트 김신 기자 bp_ks@beyondpos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