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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범의 千글자]...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입력 2026-03-20 08:41

[신형범의 千글자]...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에는 유명한 ‘광화문 글판’이 있습니다. 계절마다 하나씩, 일년에 네 번 걸리는데 1991년에 시작했으니 30년을 훌쩍 넘겨 인간 나이로는 마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얼마 전에 바뀐 ‘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한 글자 사전》에서 발췌했는데 꽃 피고 새 생명이 솟아나는 봄의 풍경이야 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가장 익숙한 기적이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주변에서는 ‘봄이 오기는 온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팎으로 온통 어지럽고 우울한 소식뿐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줄 모르고 중동에서는 뚜렷한 명분 없이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전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긴박한 소식은 세계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유가와 환율은 고물가, 저성장의 악순환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국내 정치판도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접점을 찾지 못한 여와 야는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고 그 와중에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진영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갈라치기 진흙탕 싸움 중입니다.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국민의 삶은 뒷전이고 어디를 둘러봐도 기분 좋은 얘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세상의 소란과는 별개로 계절은 한결같이 순환하며 언제나 제자리를 찾아옵니다. 답답한 현실이 봄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자연의 위대한 걸음을 멈춰 세우지는 못합니다. 며칠 신경 안 쓰고 지내다 문득 눈을 돌리면 나무며 땅이며 산들이 조금씩 연둣빛입니다. 연두는 서서히 녹색으로 바뀌면서 봄은 순식간에 번지고 계절은 어느새 바뀝니다.

예전엔 꽃들이 순서를 지켜 피었다는데 갈수록 봄에 꽃이 한꺼번에 핍니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 탓이라고 합니다. 원래 겨울에서 봄으로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완전한 겨울, 혹한의 기운이 사라진 겨울, 봄의 기운이 살짝 비치는 겨울, 봄을 반기지 않는 듯 추위가 느껴지는 겨울, 마지못해 봄에게 한번 져주는 겨울, 겨울과 봄의 기세가 팽팽한 시기, 봄기운이 완연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겨울, 이제 진짜 봄인가 싶은데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겨울 같은 봄, 머지않아 곧 봄 같은 시기 그리고 완연한 봄 등.

겨울과 봄 사이에는 이렇게나 다양한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꽃들 역시 순서에 맞게 피었는데 이제는 단계가 딱 두 개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겨울 그리고 봄. 심지어 봄을 건너뛰고 여름으로 직행하는 것 같다고 푸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올해도 봄이 왔는지도 모르게 금세 더워질 것 같습니다. 이러다 한국의 전통적인 ‘뚜렷한 사계절’은 옛날 일이 되고 말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과 우매함이 만들어낸 전쟁과 소란과 기후변화 때문에 그 무게에 눌려 어느새 곁에 와 있는 ‘기적’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 기사에서 본 장기이식 수술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어떤 환자의 말이 새삼 다시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사는 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너무도 간절하고 감사한 기적이다.” ^^*

sglee640@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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