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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범의 千글자]...건너뛰며 살아도 될까?

입력 2026-03-12 08:01

[신형범의 千글자]...건너뛰며 살아도 될까?
글도 짧은 글, 영상도 숏폼처럼 짧고 압축된 컨텐츠에 익숙하다 보니 두꺼운 책, 흔히 ‘벽돌책’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며칠 전 도서관에 갔다가 5백 페이지가 넘는 책을 하나 빌렸습니다. 서서 몇 페이지 읽다가 말랑말랑한 영화 이야기여서 두껍지만 그냥 빌리기로 했습니다. 책 한 권 읽는 데도 이것저것 따질 게 많은 세상입니다.

영화는 주로 노트북PC로 봅니다. 영화관까지 가서 볼 정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아서 웬만한 영화는 기다렸다가 노트북으로 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의식의 흐름은 영화의 속도를 저만치 앞서 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몇 초씩 건너뛰다가 급기야 재생 속도를 1.5배속으로 올립니다. 영화 한 편을 1시간도 안 돼 봐버리고는 왠지 모를 허탈감에 빠집니다. 대충 줄거리는 알지만 영화가 주는 특유의 여운과 감동은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지나간 시간 속에 흘러가버린 느낌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영화관에서 봐야 합니다. 큰 화면, 편안한 좌석에 좋은 음향시스템 등 이유야 많지만 어쩔 수 없이 몰입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제일 중요합니다. 상영관 문이 닫히고 불이 꺼지면 오히려 해방감이 느껴집니다. 멈추거나 건너뛸 수 있는 ‘자유’가 없어지고 강제로 집중해야 하는 현실이 차라리 반갑습니다.

컨텐츠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는 게 아니라 정보 단위로 쪼개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는 요즘에 책은 5분 요약, 드라마는 10분으로 압축하고 영화는 결말 포함 20분으로 정리됩니다. 시간을 아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더 가치 있는 무엇을 했는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시간을 아낀 게 아니라 해당 컨텐츠의 밀도를 희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 중에는 중요한 가치가 맥락 속에 숨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맥락은 건너뛰기와 배속으로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지루한 듯 공들여 만든 롱테이크, 연기자의 떨리는 눈동자, 불규칙한 숨소리 같은 것들은 요약본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데 사실은 대사와 대사 사이의 빈 공간 같은 이런 비효율적 순간들이 모여야 비로소 진짜 컨텐츠가 완성됩니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합니다. 때로는 거칠고 투박하며 지루하기까지 한 과정들이 생략된 채 결과만 보면 알약 하나로 영양분을 섭취하고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메뉴를 고르는 즐거움, 재료의 맛과 요리솜씨, 함께 나누는 대화가 배제된 알약은 생존은 가능하게 하지만 삶을 풍요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효율이라는 잣대로만 삶을 재단하다 보면 정작 삶을 풍요롭고 충만하게 하는 여유나 발견, 사유 같은 건 언감생심입니다.

세상을 선명하게 느끼게 해주는 건 요약된 정보가 아니라 흐릿하고 지루한 과정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익힌 총체적 감각입니다. 삶은 결코 결말이 포함된 요약본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영화의 줄거리가 아니라 지나간 장면, 풍경, 설렘과 망설임, 그 사이를 가득 채운 여백 같은 것들인지도 모릅니다. 영화도 삶도 건너뛰기에는 아까운 장면들이 너무 많습니다. ^^*

sglee640@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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